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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청춘월담. 세자 박형식 보. 흉배(胸背) 종류

by 달러박스 2023.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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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은 맡은 배역에 따라서 그 직위에 맞게  옷을 입고 한다. 세자 역을 맡은 박형식의 옷을  주변의 사람들과 비교해서 보면 궁중 복식의 상식을 알게 되어 훨씬 재미가 배가 될 것이다. 위의 두 옷의 차이점을 보면 흉배의 모양과 문양이 다르다.

흉배(胸背)의 종류

흉배와 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왕족과 백관이 입는 상복의 가슴과 등에 덧붙이던 사각형의 장식품이다. 흉배는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으로, 그 문양에 따라 품계를 나타내었고 특히 왕족이 사용하는 것은 보(補)라 하였다. 왕과 왕세자는 용 무늬[龍文]를 수놓은 원형의 보를 가슴과 등, 그리고 양어깨에 붙였다. 용의 발톱 수에 따라 오조룡(五爪龍)·사조룡(四爪龍)·삼조룡(三爪龍)으로 구별하였고 왕과 왕비는 오조룡보, 왕세자와 세자빈은 사조룡보, 왕세손은 삼조룡보를 사용하였다. 흉배는 관복과 같은 색의 비단에 다양한 문양을 수놓아 관복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상하의 계급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구실을 하였다. 계급의 표시가 되는 주도 안을 중심으로구름·여의주·파도·바위·물결·불로초·물방울··모란·완자·당초·칠보·보전···물고기·불수(佛手)·서각(犀角)·산·지초(芝草)·장생 등을 수놓았다.

흉배의 제정에 관하여 처음으로 논의가 있었던 것은 1446년(세종 28)이었다. 이때 우의정 하연(河演)과 우참찬 정인지(鄭麟趾)가 흉배를 제정하여 관복의 등위와 존비를 가리자고 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황희(黃喜)는 “검박(儉朴)을 숭상하고 사미(奢靡)를 억제하는 것이 정치의 급선무인데 국가가 문승(文勝)의폐가 있는 듯하여 항상 염려가 된다단자사라(緞子紗羅)는 우리나라의 산물이 아니다또 존비 등위는 금은각대(金銀角帶)로 정하고 있으니 흉배를 하여야만 할 이유가 없다.”라고.” 반대하여 흉배제정을 그만두었다. 그 뒤 1454년(단종 2)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문무관 3품 이상의 상복에 흉배를 붙이게 되었다. 즉, 대군은 기린, 도통사(都統使)는 사자, 왕자군(王子君)은 백택(白澤), 대사헌은 해치(獬豸), 문관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雲鶴), 3품은 백한(白鷳), 무관 1·2품은 호표(虎豹), 3품은 웅비(熊羆)를 달도록 정하였다. 이것은.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를 본뜬 것인데, 시행 도중 명나라 사신과의 구별이 어려워 불편하니 개혁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뚜렷한 개혁은 없었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흉배를 사용하게 되었고, 또한 사용된 문양도 명나라와는 전혀 다른 사슴·돼지·거위·기러기. 그러나 이때의 흉배 제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혼란이 생겨서인지 무신의 흉배에 비금(飛禽)을 혼용하지 못하도록 금하자는 기록이 보인다.

1734년(영조 10)에 와서는 간편하게 문관 당상관은 운학 흉배, 당하관은 백학 흉배를 사용하게 하였다.

1871년(고종 8)에는 문관 당상관은 쌍학(雙鶴), 당하관은 단학(單鶴), 무관 당상관은 쌍호(雙虎), 당하관은 단호(單虎)를 사용하게 하였는데, 제도는 1910년까지 시행되었다.

사극 드라마의 일반적인 옷은 고종 때를 기준으로 하여 복식을 재조명해서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옷도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의 복식에 대해 재미있는 발견을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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