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식

사탕수수.꿀을 만들어 내는 갈대. 국가별 1인당 연간 설탕 섭취량

by 달러박스 2023. 3. 17.

꿀을 만들어 내는 갈대라고 부르는 것은  사탕수수이다. 사탕수수는  사탕, 껌과 각종 과자, 탄산음료에 들어가는 설탕의 원료이다.

 

국가별 1인당 연간 설탕 섭취량(kg당)

2022년 통계표

연간 1인당 설탕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말레이시아(58.2kg) △브라질(48.9kg) △뉴질랜드(47.0kg) △태국(43.9kg) △페루(42.4kg) 순이다. 한국(31.8kg)으로 한국은 OECD 평균(32.3kg)과 선진국 평균(32.0kg)과 유사한 수치를 보였으나 설탕 섭취 권장량보다 2.5~3.5배 더 많이 섭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 사탕수수와 설탕의 전파

 

사탕수수는 기원전 8천 년 경에 태평양의 뉴기니(New Guinea)섬 주민들이 최초로 재배했다고 알려져 있다. 뉴기니를 비롯한 남태평양 일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재배되었고, 이후 기원전 4세기에 인도로 전파되었다. 인도에서는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의식들에 공물로 설탕을 사용했다.

기원전 326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원정을 갔는데, 이때 그리스군이 사탕수수를 알 게 되었다. 알렉산더 휘하의 장군 네아르쿠스(Nearchus)는 사탕수수를 가리켜 “벌의 도움 없이 꿀을 생산하는 갈대”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 사탕수수를 그대로 씹어 단맛을 맛보았다가 4세기 경 인도인들이 결정 형태의 설탕을 만드는 법을 고안해 냈다. 이후 6세기에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에 사탕수수 재배법과 설탕 제조법이 전해졌다. 750년 이슬람권에 큰 변혁이 일어났다. 압바스 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 중국 당나라에서는 고구려 유민출신 장군 고선지(高仙芝)의 2차 서역 원정이 있었다. 751년 현재 카자흐스탄의 영내에 있는 탈라스 지역에서 압바스 왕조의 원정군과 고선지가 이끄는 당의 군대 3만 명의 전투가 있었고, 이때 승리한 압바스 왕조는 이 지역을 이슬람권에 귀속시켰다. 이 전투 이후 이슬람권과 중국에 사탕수수와 설탕이 널리 전파되었다. 이후 통상로를 통해 이집트에도 전해졌다.

 

10세기 경에 이르면 설탕은 중동지역의 주요한 작물이 되었다. 아랍인들은 기후가 따뜻한 지중해에 있는 시칠리아, 키프로스, 몰타, 로도스 섬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 연안에 사탕수수를 들여와 경작하고, 설탕 제조 기술을 보급하였다. 설탕은 이슬람교의 포교지역으로 퍼져나가 15세기 말엽에는 서아프리카를 포함하여 마데이라, 카나리아, 카보베르데 제도 등지에서도 재배되었다.

 

설탕이 유럽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였다. 십자군 원정은 피비린내 나고 섬뜩했던 충돌이지만 한편으로는 정보교환의 장이기도 했다. 십자군은 유럽에서는 보지 못한 이슬람 세계의 여러 문물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사탕수수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1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한 군인은 사탕수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 주크라(zukra)라고 부르는 꿀 갈대를 많이 볼 수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이 갈대를 열심히 빨아먹는데 익숙했으며 그 맛있는 수액을 즐겼다. 그 수액은 단맛이 나긴 했지만 전혀 물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무슬림에게서 사탕수수 재배법, 설탕 정제법 등을 알게 되었다.

 

<설탕> 엘리자베스 여왕의 검은 치아

 

<설탕> 엘리자베스 여왕의 검은 치아

엘리자베스 1세의 여왕의 치아가 검정 치아였다는 것을 아시나요? 여왕의 충치를 본 독일 방문객 은 “영국인은 설탕을 너무 많이 먹어서 이가 잘 썩는 것 같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엘리자

dollarbox.tistory.com

 

2. 설탕의 이용

 

1) 약재로 사용되었던 설탕

 

유럽에서 설탕은 처음에는 후추, 계피, 정향, 육두구, 사프란 등과 같이 향신료나 약재의 하나로 취급했다. 당시 향신료는 희귀하고 값이 비싼 동방의 산물로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설탕은 이때 음식이라기보다는 너무나 귀하고 비싸 약국에서 약으로 팔았 고, 심지어 흑사병이 돌 때엔 의사들의 처방전이기도 했다. 지금도 포도당 주사를 맞으면 회복이 빠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처방이다.

 

2) 품위의 증표

 

설탕 설탕은 처음에는 값이 매우 비싸서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데 아주 적합한 음식이었다. 1299년 프랑스 백작부인이 남긴 가계부를 보면 설탕 가격은 같은 무게의 은값과 같았다. 하얀 수정같이 맑게 정제된 설탕은 최고의 사치품으로서 페르시아에서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 축제를 빛내는 호화로운 장식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설탕으로 만든 실물 크기의 나무, 탁자만 한 크기의 성과 이슬람 사원으로 사치스러운 연회를 장식함으로써 주최자는 한껏 부를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막대한 양의 설탕과 기름, 으깬 아몬드와 땅콩을 혼합해서 화려한 설탕 장식을 만드는 것이 유행하였다. 1515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행해진 울지(Wolsey)추기경의 호화로운 취임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굽거나 건조한 설탕으로 만든 멋진 성과 탑, 말과 곰, 그리고 원숭이도 구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달콤한 사탕과자를 곁들임으로써 하객들은 주최자의 권력을 눈으로 맛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기 때문에 설탕은 문자 그대로 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지금도 결혼식 피로연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리고 설탕 장식을 올린 케이크는 이런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