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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 두레. 계. 향약

by 달러박스 2023.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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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종교나 놀이뿐 아니라 농사 등 다양한 일도 마음을 하나로 모았어요. 마을을 이루고 한데 모여 사는 사람들에게 ‘함께한다’는 생각은 꼭 필요했습니다. 이것을 ‘공동체 의식’이라고 합니다. 조상들의 협동 생활로는 품앗이, 두레, 계, 향약 등이 있습니다.

품앗이

 

우리 조상들은 종교뿐 아니라 농사짓는 일, 함께 즐기는 놀이에서도 마음을 하나로 모았어요. 특히 농사짓는 일은 무척 힘들어 서로 돕지 않고서는 해 나가기가 어려웠어요.
“여보게, 어제는 자네가 내 밭을 매 주었으니, 오늘은 내가 자네 집 밭일을 도와주겠네.”
“아이고, 고맙네그려!”
이처럼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서로의 일을 번갈아 가며 도와주는 것을 ‘품앗이’라고 해요. 품앗이는 일하는 때와 계절에 관계없이 이루어졌어요.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렷해서 씨앗을 심기에 알맞은 때와 거두기에 알맞은 때가 따로 있어요. 이런 때를 놓치면 한 해의 농사를 그르치고, 그러면 1년 내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품앗이를 통해 서로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지요.

 

<품앗이 종류>

농사뿐 아니라 김장 담그기, 지붕 얹기 등도 품앗이를 했어요. 옛날 초가집은 2~3년마다 한 번씩 지푸라기를 엮어 지붕을 새로 얹어 주어야 했기 때문에 큰 일거리였답니다.

 

두레

 

두레의 유래

두레라는 말은 '두르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두르다라는 말은 원래 여러 사람이 모인 상태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일정한 집단, 조직을 표시하는 말인듯하다.

농민들이 농번기에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마을 단위로 만든 조직. 두레는 농민들이 농번기에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마을 단위로 만든 조직이에요.

농사일에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럿이 함께 일하면 혼자 할 때보다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어요. 주로 모내기·김매기 때와 같이 단기간 내에 대규모의 노동력을 집중해서 투입해야 할 때 이루어졌지요.

두레는 조선 후기에 이앙법이 널리 퍼지면서 농민들의 생활풍습으로 정착되었고 농민문화에 풍물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또한 두레싸움, 두레밥, 두레기, 두레놀이와 같은 농민생활풍습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요.

두레의 상부상조 전통은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자리잡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답니다.

 농사일에서 가장 힘든 것은 논에 작은 벼를 옮겨 심는 모내기와 논밭의 잡초를 뽑는 김매기예요. 일손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와 ‘일꾼 모임’을 만들어, 마을 전체의 농사일을 한꺼번에 해결했어요.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하기 위해 만든 것을 ‘두레’라고 해요. 두레는 농사를 지을 때뿐 아니라 마을 잔치나 마을 사람 중 누군가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에도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기꺼이 일손을 도왔답니다.

두레에 참가한 사람을 ‘두레꾼’이라 하고, 모임 전체를 일컬어 ‘두레패’라고 해요. 두레패에는 모임을 이끄는 사람과 그를 돕는 사람, 일을 지시하는 사람, 규칙을 어기는 이가 없는지 감시하는 사람 등이 정해져 있었어요. 두레패가 일을 하러 가기 전에는 먼저 농사가 잘 되라는 뜻으로 조상들께 제사를 올렸어요. 그런 다음 줄줄이 모여 논으로 가는데, 이때는 커다란 깃발을 든 사람이 앞장을 섰어요. 깃발에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글자를 써넣었으며, 이것은 ‘농사야말로 천하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에요. 두레패는 일꾼이 없는 집의 일도 기꺼이 도와주었어요. 무엇보다 서로 돕고 사는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여자들의 두레, 길쌈〉
‘길쌈’이란 삼베나 모시 등에서 실을 뽑고, 이것으로 옷감을 짜는 일을 말해요. 여름이 끝나갈 무렵 마을의 여자들은 이렇게 길쌈 두레를 하면서 서로 솜씨를 겨루기도 하고, 흥겨운 길쌈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요.

 

두레와 품앗이의 차이

두레는 한 가구당 한 명씩 일꾼이 의무적으로 나와서 마을의 모든 논에 모내기를 해주는 것이고, 품앗이는 마음 맞는 사람이나 이웃끼리 5~10명이 모여서 윤번제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백성들은 대부분 가난했어요. 그런데 아들딸이 결혼식을 할 때, 집안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러야 할 때, 또는 집을 새로 지을 때에는 큰돈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 중 마음에 맞는 이들끼리 돈이나 곡식을 모아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 쓰도록 했어요. 이렇게 경제적으로 서로 돕기 위해 만든 조직을 ‘계’라고 해요. 이러한 계는 같은 마을에 살지 않더라도 친척 사이에, 또는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 사이에서도 이루어졌어요. 이런 전통은 오늘날에도 남아서 종종 어른들끼리 계를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어요.

결혼이나 장례 등 집안의 큰일을 치를 때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도움을 줘요. 이것을 ‘부조’라고 하고, 이때 건네는 돈을 ‘부조금’이라고 해요. 옛날의 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에요.

 

향약

조선 시대 지방의 양반들이 만든 규약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향촌 사회의 주민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정해 놓은 것이다. 마을의 덕화 및 상호 협조 등을 위하여 만든 규약이다. 조선 중엽 이후로 널리 시행되었다. 그 기본  4대 강령은 '좋은 행실은 서로 권하고(덕업 상권 : 德業相勸), 옳지 않은 일은 서로 규제하고(과실 상규 : 過失相規), 예의와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예속 상교 : 禮俗相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환난상휼 : 患難相恤)'입니다.

 

조선 시대의 향약은 중국의 여씨향약을 본받은 것으로 여씨향약이란 11세기 초에 중국 북송의 산시 성에 살았던 여씨 가문이 만든 자치 규약입니다. 여씨 가문의 4형제는 학문이 높고 인품이 뛰어나 지역에서 존경을 받았어요. 이들은 집안과 향촌 사람들이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 규약을 마련했는데, 이를 향약이라고 했어요. 향약의 4대 덕목은 좋은 일은 서로 권할 것, 잘못은 고쳐 줄 것, 서로 예의를 지킬 것,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서로 도울 것 등이었어요. 이후 여씨향약이 다른 지방에 모범으로 알려지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어요.

조선에서 향약을 만들고 이를 지키도록 감독한 것은 서원을 중심으로 한 지방의 사림 세력이었어요. 제11대 임금인 중종 때 이미 조광조가 유향소를 폐지하는 대신 향약을 보급하자고 주장했지만,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인해 쫓겨나면서 무산되었어요. 그러다 선조 이후 사림파가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전국적으로 향약이 보급되었어요. 이황이 만든 향약 규약은 제자들에 의해 영남 등 여러 지방에서 활용됩니다. 이이도 충청도 청주와 황해도 해주 등 여러 지역의 향약을 만들었어요. 유교의 가르침을 구체화시킨 향약은 지방 양반들이 고을 농민들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어요. 예를 들어 양반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았을 경우, 마을 행사에 필요한 공동 자금을 내지 않았을 경우 등 하나하나 지켜야 할 약속과 벌칙이 정해져 있었어요. 마을 농민들은 공식적인 지방 수령의 지배 외에도, 향약을 통해 지방 양반의 지배도 받았다고 보아요. 정권 다툼에서 훈구파에 져 지방으로 밀려난 사림파 서원과 향약을 통해 서서히 세력을 키워 갔어요. 이들은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기르면서 향촌 사회를 장악했고, 이 힘을 바탕으로 다시금 정권을 잡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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