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笏)은 조선시대 관원이 알현(謁見)할 때에 손에 쥔 물건을 말하며, 홀은 벼슬아치가 조복(朝服)•제복(祭服)•공복(公服) 차림을 하였을 때에 손에 쥐는 작은 판(板)입니다. 그 신분에 따라 1품(一品)부터 4품(四品)까지의 관원은 상아(象牙)로 만든 아홀(牙笏)을, 5품(五品) 아래로 9품관은 괴화(槐花)로 만든 목홀(木笏)을 향리(鄕吏)는 공복에만 목홀을 갖추어 손에 들었습니다. 홀의 길이 약 60cm, 나비 약 6cm가 되도록 얄팍하고 길쭉하게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홀(笏)은 관료들이 조회할 때 손에 쥐는 상아나 나무로 만든 물건으로 『석명(釋名)』에 ‘忽(홀)’이라 하였고, 군(君)이 교명(敎命)이 있거나 군신이 교명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대사(大射)와 향사(鄕射) 등 경례(敬禮)에 의례용으로 손에 쥐었으며, 또한 천자(天子)를 알현할 때 천자에 대한 예의를 지킴과 동시에 군전에 이르러 명(命)을 받들어 기록하기 위한 수판(手板)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홀(笏)의 용도
홀(笏)의 용도는 처음에는 왕의 교명이나 자신의 계사(啓辭)를 그 위에 적어 비망(備忘)으로 삼기 위해 쓰였으나 후세에는 단지 의례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홀(笏)은 중국에서는 주나라 이전부터 사용되었고, 우리나라는 당나라의 4색 공복 제도를 받아들였던 때로 보아 신라 때부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 때에는 981년(고려 성종 1)에 홀의 제도가 마련되었고, 그 내용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남아 있습니다.
홀(笏)은 본디 중국의 제도입니다. 중국에서는 규(圭)와 홀이 용도에 따라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즉 규는 서옥(瑞玉)이며, 홀은 수판이었습니다. 중국의 천자는 진규(鎭圭), 공(公)은 환규(桓圭), 후(侯)는 신규(信圭)를 잡고, 백(伯)은 궁규(躬圭)를 잡는데 이는 다 옥기(玉器) 입니다. 홀이란 잊어버리지 않게 기록하기 위하여 손에 드는 것인데, 천자는 구옥(球玉)으로 만들고, 제후는 상아로 만들며, 대부(大夫)는 어수문죽(魚須文竹)으로 만들고, 선비는 대[竹]로 만든다고 하여 그 모양과 형식이 같지 않고 그 쓰임새도 각각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한시(漢詩)에 수판을 뽑아 숭상에게 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나라 때에도 소관(小官)들은 수판을 가졌습니다.
홀(笏)의 종류
우리나라에서 홀(笏)이 사용된 것은 신라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4색 공복 제도는 당나라의 제도를 본 딴 것이므로 5품 이상은 상아홀, 6품 이하는 죽목홀(竹木笏)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고려시대 982년(고려 성종 1)에는 신라의 고례에 따라 홀의 제도를 마련하였는데 『고려도경』에 고려의 왕은 제사를 지낼 때는 면류관(冕旒冠)에 옥규(玉圭)를 들지만, 중국 사신이 방문하여 맞아들일 때는 자색비단[紫羅] 공복에 상아홀을 들고 옥대(玉帶)를 하였습니다. 또한 6품 이하 서관(庶官)들은 녹의(綠衣)에 목홀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원년부터 조정에서 정한 관복을 입게 하고자 예조(禮曹)에서 상세한 내용을 정하게 하였는데 1품과 2품은 홍포(紅袍), 3품과 4품은 청포에 각각 상아홀을 들게 하고, 5품과 6품은 청포(靑袍)에 목홀, 7품 이하는 녹포(綠袍)에 목홀을 들도록 하였습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시골 아전은 공복 착용 때에만 목홀을 든다는 내용이 추가된 것 외에는 태조 원년에 정해진 것과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조선시대에 걸쳐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언각비(雅言覺非)』에는 홀과 규는 본래 같은 것이 아닌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못 인식하여 왕이 쥔 것을 규라 하고 백관이 드는 것을 홀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제도와는 달리 왕이 규를 쥘 때 왕세자 이하 백관들이 홀을 의례적으로 쥐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칭과 크기·형태를 살펴보면, 『예기(禮記)』 옥조(玉條) 주(註)에 천자가 갖는 옥홀을 정(珽)이라 하였습니다. 홀의 길이는 2자 6치이고, 정이라 한 것은 꼿꼿하여 굴하는 일이 없다는 데서 취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홀의 머리에서 4치 이하는 약간 죽어 있고 꼭대기의 4치는 망치의 머리와 비슷한데 이를 종규수(終葵首)라 합니다.
제후가 꽂는 홀(笏)은 도(荼)라 하고 홀의 머리는 둥글게 깎였고 아래쪽은 방정합니다. 제후는 위에는 천자가 있으므로 홀(笏)의 머리를 둥글게 깎아 겸양의 뜻을 나타냅니다. 대부 이하의 것은 모두 홀이라고 부르며 전굴후굴(前詘後詘)의 형태입니다. 즉 대부 이하는 겸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당나라 때 홀은 짧고 두꺼워 구부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홀은 상원하방(上圓下方)이며 죽목홀은 상좌하방(上挫下方)입니다. 너비에 있어서는 송나라 철종(哲宗)이 눈병을 앓자 여러 신하들을 보는 것을 싫어해서 아뢰는 자들은 홀의 면을 넓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시대의 홀(笏)호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조관(朝官)들이 잡고 있는 홀(笏)이 다 넓은 머리가 밑에 있어 중국의 제도와는 다르므로 예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홀의 제도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중국과는 달리 사용 목적 및 형태, 드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9세기 말 대원군(大院君)이 지녔던 상아홀은 길이가 31.5㎝, 폭이 3.8~5.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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