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를면(麵)이라고도 한다. 전세계적으로 널리 먹는 요리로 제조나 조리가 비교적 간단하기 때문에 빵보다 역사가 깊다. 기원전 6,000년~5,000년경부터 아시아 지역에서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서아시아 지역에서부터라는 설, 중국에서부터라는 설, 이탈리아에서부터라는 설 등 다양하지만 정확하게 규명된 바는 없다.
최근 중국 중서부 칭하이성 황하강 유역의 라자 지방에서 4,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국수가 발견되었는데,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제면 기술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비벼서 면을 뽑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
기원전 7,0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 재배되던 야생종 밀은 기원전 1-2세기경, 서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국에 전해졌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따르면 전한(前漢)의 한무제(漢武帝)는 오랑캐인 흉노(匈奴)를 견제하기 위해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서방과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개척하면서 이를 통해 밀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물들이 중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중국에서는 처음에 밀가루를 이용한 수제비 형태의 면을 먹다가 후한(後漢) 때부터 가늘고 긴 형태의 국수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5-6세기인 진나라 시대에는 단자나 전병과 비슷한 수인병(水引餠)이라는 국수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밀가루를 면(麵)이라 하였고, 면으로 만든 것을 가리켜 병(餠)이라 하였다. 찐 것을 증병(蒸餠), 구운 것을 소병(燒餠), 기름에 튀긴 것을 유병(油餠), 국물에 삶은 것을 탕병(湯餠)이라고 하여 국수도 병(餠)이라 하였다. 이후에 국수를 가리키는 용어인 병(餠)은 수인병(水引餠), 색병(索餠), 색면(索麵), 납면(拉麵)과 타면(打麵)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쌀로 만든 떡을 병(餠)이라 하고 국수를 면(麵)이라고 하였다. 삶은 면을 물로 헹구어 건져 올린다고 하여 국수(掬水)라고 칭하였다.
6세기경에 쓰여진 중국 농서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국수 만드는 법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중국 송나라 때 국수 만드는 법이 전해져, 삼국시대나 통일 신라시대부터 면을 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고려시대 제례에 면을 쓰고 사원에서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는 내용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으나 국수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고려말 《노걸대(老乞大) 》에는 ‘우리 고려인은 습면(濕麵)을 먹는 습관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밀이 매우 귀해서 일상식이 아닌 귀족들의 행사인 결혼식, 회갑연, 제례 등과 같은 날에 먹는 특별식이었으며, 결혼식 때에 국수 먹는 풍습이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보면 ‘고려에는 밀이 적기 때문에 주로 화북지방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밀가루의 값이 매우 비싸 성례(成禮) 때가 아니면 먹기 힘들다’라는 기록과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 》에 ‘국수는 본디 밀가루로 만든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메밀가루로 만든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밀가루보다는 메밀가루를 국수의 재료로 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국수는 총 50여종으로 국수의 주재료는 메밀가루였으며, 그 다음으로 밀가루와 녹두가루 등이 국수의 재료로 많이 이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메밀가루가 많이 생산되는 북쪽 지방에서는 메밀을 이용한 국수나 냉면이 발달하였고, 남쪽은 밀가루를 이용한 칼국수가 발달하였다.
조선시대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예를 중시하여 의례음식이 발달하였는데, 의례음식에서 면의 이용은 매우 다양한 편이었다. 조선시대 때도 밀가루는 진말(眞末)이라 하여 매우 귀한 식품이었기 때문에 밀 대신 메밀을 이용한 국수가 발달하였다.
조선왕조에서 궁중연회를 베풀 때의 준비 절차와 연회 음식을 기록한 《진찬의궤》나 《진연의궤》에 보면 국수장국에 관한 내용이 20여 차례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메밀을 이용한 국수가 많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결혼이나 생일, 회갑 등의 잔치가 있거나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는 의미로 제사상에 국수를 올리기도 하였다. 국수가 통과의례에 빠지지 않고 올려지는 이유는 국수모양이 길게 이어진 것이 경사스러운 일 또는 추모의 의미가 길게 이어지기를 염원하는 뜻에 연유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나라에선 밀이 잘 자라지 않아 밀로 만든 음식은 생일, 회갑연, 혼례 등 경사스러운 날에 손님을 대접하던 귀한 음식이었다. 고서(古書)들을 보아도 황제나 고관의 생일잔치 때에나 국수를 먹었다는 기록들이 자주 보인다.
조상들은 국수를 장수나 오랜 인연을 기원하던 상서로운 음식이라 여겼다. 그래서 잔치가 있는 날 국수를 손님에게 대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상들은 국수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을까?
이탈리아 <뇨키>는 한국 <수제비> 비슷하다./<칼국수>
국수의 의미
생일, 회갑연 <장수의 의미>
국수는 음식 가운데 길이가 가장 길기 때문에 생일, 회갑연 등에 선물해주어 국수 면발처럼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무병장수를 의미 했다.
국수를 장수를 비는 음식으로 여기게 된 것은 당나라 때부터인데 남송 때의 학자인 주익은 ‘의각료잡기((아,의)覺寮雜記)’라는 책에 ‘당나라 사람들은 생일에 다양한 국수를 먹는데 세상에서 이를 보고 장수를 소원하는 음식이라 장수면(長壽麵)이라고 부른다’고 적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선 북송 때 사람 마영경도 ‘나진자(懶眞子)’라는 책에서 당나라 시인 유영경의 시를 인용하면서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먹으며 하늘의 기린만큼 오래 살기를 기원하노라”라고 읊었고 한다.
조선시대만 해도 밀가루는 귀한 식자재였다. 이런 귀한 식자재로 만든 국수를 생일 잔칫날 먹었으니 귀한 음식을 먹으며 오래오래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결혼 <인연의 기원>
흔히 우리는 결혼에 대한 관용적인 표현으로 “언제 국수 먹여주냐”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이 또한 잔칫상에 국수가 올라왔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려도경 잡속(雜俗)편에 “밀가루 값이 비싸 성례 때가 아니면 먹지 못한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혼례를 치루면 잔치를 열어 손님에게 상을 대접하곤 하였는데, 이때 국수가 올라왔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이 국수 가닥처럼 길게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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