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장신구 비녀는 우리 전통 사회에서 혼인한 여인이 쪽을 진 머리가 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꽂거나, 관(冠)이나 가체를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꽂는 장식품입니다. 비녀에는 꽂는 이의 넋을 모으는 마력이 있다고 생각했고,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화장 기구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여성이 비녀를 잃거나 빼면 정절이나 긍지를 잃음을 상징했습니다. 비녀는 여인이 머리를 틀어 올려 장식할 때 꽂은 것으로 잠두의 모양에 따라 봉잠, 용잠, 모란잠, 국화잠 등으로 불렀습니다.
비녀의 명칭과 상징성
비녀의 명칭은 잠두(簪頭)의 모양에 따라 달랐는데 봉황잠, 용잠, 원앙잠, 매죽잠, 모란잠, 석류잠, 국화잠 등이 있습니다. 이 같은 잠두의 장식은 대부분 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특히 부귀와 다남, 장수의 기원을 담고 있습니다.
비녀에 관련된 전설
함경도 지역에서 구전되는 승천 신화 ‘치원대 양산복’에서는 비녀가 사랑하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매개물로 등장합니다.
어느 마을에 치원대와 양산복 두 아이가 한날한시에 태어났습니다. 여자인 치원대는 부모에 의해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자랐습니다. 둘이는 한방에서 같이 공부를 하며 지냈는데, 치원대가 여자임을 안 양산복은 상사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그는 “치원대가 시집가는 길목에 묻고 봉분을 만들어 달라.”라고 유언했습니다. 시집가는 날, 치원대는 양산복 무덤을 지나다가 오줌을 누겠다며 가마에서 내려 양산복의 무덤으로 가서 금채봉 비녀를 뽑아 무덤 한복판을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무덤이 둘로 갈라지고, 그 순간 치원대는 무덤 속으로 뛰어들어 갔습니다. 치원대를 삼킨 무덤은 신랑의 손에 치원대의 찢긴 치맛자락만 남긴 채 닫혀 버렸습니다. 얼마 안 되어 무덤에서 찬란한 쌍무지개가 솟고 두 남녀는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이처럼 비녀는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저승에서 이루도록 하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허난설헌의 '비녀'
제게 있는 이 하나의 금비녀
이것은 시집올 때 찌른 것이네
이제 떠나는 당신에게 드리오니
천리 멀리서도 늘 생각하시라
허난설헌의 「효최국보체(效崔國輔體)」이다. 비녀는 임과의 정표를 상징했다. 외형상 비녀는 남근을 상징하며, 비녀는 남자를 경험한 여자, 즉 기혼녀만이 꽂을 자격이 있었다.
단오날의 '비녀'
다만 단옷날에 한해서 처녀도 비녀를 꽂을 수 있었고, 부인은 새 비녀를 꽂았습니다. 단옷날 아침에 창포 뿌리를 깎아 비녀를 만들고, 여기에 붉은 글씨로 수(壽) 자와 복(福) 자를 새겨 양끝에 연지를 발라 머리에 꽂았습니다. 유만공의 『세시풍요』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단오 옷은 젊은 남자에게 잘 맞으니
가는 모시베로 만든 홑치마에 잇빛이 선명하네
꽃다운 나무 아래에서 그네를 다 파하고
창포 뿌리 비녀 떨어지니, 작은 머리털이 비녀에 두루 있다
단옷날의 비녀는 삿된 것과 액을 물리치기 위한 것으로, 작은 머리털이 떨어진 비녀에 두루 있는 것은 재액이 모두 떨어졌음을 상징합니다. 또 나무를 깎아 끝이 뾰족하게 하여 비녀로 삼아 머리에 꽂고 다녔는데, 마치 싹이 돋아나는 모습처럼 윗부분 양쪽에 창포잎을 붙였습니다. 비녀와 창포 잎은 머리를 장식하고 봄의 소생이 가져다주는 희망의 표지 역할을 겸했습니다.
무속에서의 '비녀'
무속에서는 비녀를 서낭신으로 신봉한 곳이 많은데, 삼척 지방에서는 비녀를 신격화하여 오금잠제(烏金簪祭)를 지냈습니다. 무당은 비녀 신을 통해 마을의 풍년과 풍어, 가정의 안녕을 빌어 주었습니다. 비녀는 벼슬이나 출세를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비녀와 갓끈을 가리키는 잠영(簪纓)이라는 말은 흔히 벼슬이 높은 사람을 뜻하고, 관에 꽂는 비녀와 손에 쥐는 홀을 뜻하는 잠홀(簪笏)은 예복을 입은 벼슬아치인 고관을 상징했습니다.
신분에 따른 '비녀'
신분에 따라 비녀 사용에도 차별이 있었습니다. 신라 흥덕왕 때에는 비녀 사용을 제한하는 금제가 발표되었는데, 진골 여자는 비녀에 각루(刻鏤) 및 철주(綴珠)하는 것을 금했고, 6두품 여자는 순금 비녀와 은각루 및 철주를 금했습니다. 5두품 여자는 백은 이하를 쓰고, 4두품 여자는 각루, 철주 및 순금 비녀를 금했습니다. 평민 여자는 유석(鍮石) 이하를 사용하게 했습니다. 또 조선 시대에 봉황잠은 왕세자비, 용잠은 왕비만 꽂았습니다. 사대부가에는 혼례식 등 각종 의식에만 용잠이 허락되었으며, 서민에게는 혼례 때에만 용잠이 허락되었습니다. 재료도 차별되어 금, 은, 옥으로 된 비녀는 상류층 여인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리고 버드나무를 깎아 만든 백목 비녀는 남편을 여읜 여인이 소상 때까지 쓰고, 흑목 비녀는 소상 때부터 대상 때까지 쓰는 미망인의 상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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