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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조선시대 요리사 신분은 공노비. 최초의 궁중요리식당'명월관'

by 달러박스 2023.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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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요리사의 신분은 공노비이다. 남자 요리사를 숙수(熟手)라고 불렀다. <실록>에 숙수노, 즉 숙수 일을 하는 노비라는 단어가 나온다. 궁궐 안에서 일한다는 뜻에서 궐내차노비로 불렀다. 대전과 왕비전, 문소전 등에 소속된 공노비의 신분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대장금처럼 여성이 아니다. '숙수'인. 공노비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상을 받거나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일은 무척 고된 편이었다. 비록 사옹원에 속한 인원이 수백 명이라고는 하나 왕실의 잔치와 제사는 끝이 없었다. 거기다 권세가들이 부르면 집으로 가서 음식을 바쳐야만 했다. 밤을 새기도 하고 음식에 문제가 생길 경우 처벌을 면치 못했다.

숙수와 관련된 사건사고들도 많았다. 세조 때는 문소전의 각색장 유산(劉山)이 도둑질을 한 물건을 가지고 궁궐 밖으로 나가려다가 들켜서 처벌받은 사건이 있었고, 중종 때는 두모포에 임금에게 바칠 물고기를 잡으러 갔던 각색장 신세영(申世永)이 물에 빠져 죽는 일도 있었다.

 

각색장 말손(末孫)이 다섯달 동안 출근하지 않고 행방을 감추자 사옹원의 제조가 그 아내를 잡아다가 관노로 삼으려고 했다가 신하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때 중종은 법에 없는 일이라며 항의하는 신하들에게 각색장의 일이 어렵고 힘들어 다들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도 했다. 품계를 가진 각색장이 이 정도였으니 노비 신분의 숙수들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지 짐작이 간다.

 

한편, 임진왜란 때 세자를 호종한 반감 양언복(梁彦福)과 각색장 서수남(徐守男)은 호종공신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각색장노라는 표현이 <실록>에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숙수 중에서 노비의 신분을 유지한 채 승진한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숙수들은 주방일을 빼고도 궁궐 안의 각종 허드렛일은 물론 권세가들의 연회에도 동원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 생홍합을 수라상에 올릴 때 모래를 충분히 빼지 않아서 고종의 치아가 상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숙수 김원근(金元根)과 숙수패장 김완성(金完成)등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태형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숙수는 차츰 집안 대대로 세습이 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교대 근무였기 때문에 궁궐에서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그릇을 팔거나 빌려주는 일을 하거나 밖에서 숙수 노릇을 한 것으로 보인다.

 

민간에도 숙수들이 존재했다. <조야회통>에는 파주 교하에 사는 숙수 개천이 양반들의 부녀자를 희롱하는 얘기를 했다가 곤장을 받은 사례가 보인다. 아울러 광해 2년인 1610년에는 제사를 맡은 관청인 봉상시에서 궁중의 숙수들이 부족해서 한양의 사 숙수 들을 임시로 채용해서 일을 시키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위 사례를 보면 궁궐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남자 요리사들이 있었는 듯하다. 아마 궁궐에서 숙수로 일하다 면천된 이들이 밖으로 나가서 이들에게 조리법을 배운 듯하다.

 

이렇게 숙수들은 조선 왕조의 멸망과 함께 변화되었다. 궁중의 음식을 책임지던 사옹원도 한말인 1885년 전선사로 명칭이 바뀌면서 궁내부에 소속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퇴위하자 궁내부가 폐지되었다. 왕조의 몰락으로 궁중 요리사인 숙수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전선사장으로 일하던 안순환(安淳煥)1903년 지금의 동아일보 자리에 최초의 요릿집인 명월관을 열었다. 이때 궁중에서 일하던 숙수들이 나오면서 궁중요리라는 새로운 장르의 음식문화가 생기게 되었다. 고종의. 요리사였던 안순환은 1903년 요릿집 '명월관'을 세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조선경성 명월관본점

 

명월관의 메뉴

명월관에서는 겸상이 없는 궁중 의례를 따라 손님 일인당 본상과 곁상으로 은그릇에 조치(장조치, 젓국조치. 조치는 찌개를 가리키는 궁중용어), 편육, 육회 등 12첩 상반상을 제공했다. 훗날 외국 요리도 제공했다. 궁중 나인 출신이 약주·소주를 만들었고 나중엔 맥주와 일본 정종도 팔았다. 왕이 살아 있던 시절, 왕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되어 일자리를 잃은 기생들로 기생과 함께 한 명월관이었다. 최고의 기생들을 보냈다. 명월관은 곧 조선에 널리 알려졌다.

 

안순환이 숙수였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관리 책임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안순환에 의해 궁중에서 빠져나온 요리들은 일제강점기 기생과 더불어 조선을 상징하는 궁중식당의 모델이었다. 이후 식당 이름에 관 또는 궁이 그 대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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