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복식은 삼국시대의 복식을 계승하면서도 중국의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의복과 장식을 도입하였습니다. 특히, 귀족과 관리들은 당나라의 관복을 모방하여 복두라는 모자와 단령이라는 둥근 깃의 옷을 입었습니다. 또한, 반비, 배당, 표 등의 다양한 겉옷과 소매를 입었습니다. 평민들은 신라 고유의 저고리와 바지를 착용하였으며, 여성들은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고 가슴 위에 대를 매었습니다. 머리 장식으로는 슬슬전이나 당관을 모방한 화관, 빗, 비녀 등을 사용하였습니다.
통일신라 복식은 전체적으로 신라의 복식 제도를 바탕으로 당시 관계가 깊던 중국의 당(唐)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였습니다. 따라서 복식은 물론 생활 전반에서 중국과의 교역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통일신라의 흥덕왕 때에는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하여 생활 전반에서 수입 물품이 너무 사용되어지는 까닭에 흥덕왕은 "다른 나라의 것을 진기하게 여기고 우리의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풍조가 가득하다"라고 하고 이를 고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각 계급의 남녀별로 구분하여 상세하게 규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통일신라의 의생활이 얼마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호화롭고도 아름답게 꾸몄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골인 남성의 경우에는 복두를 쓰는데 어떠한 재료로 만들어도 가능하지만,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6두품 남성의 경우에는 아주 고운 비단으로 만들 수 있었고, 평민 남성은 일반적인 실크나 포(布)로만 만들 수 있게 하는 등 세세하게 계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재질의 품질을 정하였습니다. 또 여성의 경우에도 이러한 규정이 정해져 진골 여성의 경우 슬슬전(瑟瑟鈿)이라고 하는 터키석을 박아 장식한 호화로운 관(冠)을 쓸 수 있지만 6두품 이하의 여성들은 고급 비단으로 만든 관을 쓸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슬슬이란 중국에서도 고대부터 귀하게 여긴 벽색(碧色) 보석인데, 서역에서 전래된 것으로 일명 터키석이라고 불리는 녹송석(綠松石)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鈿)이란 원래 양감으로 하는 장식 세공의 하나를 말합니다. 따라서 ‘슬슬전’은 녹송석을 양감식한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슬슬전은 실크로드 지역에서도 착용되던 고급 쓰개로 주로 왕비와 같은 최고 지위의 여성들만 사용하던 재질이었습니다. 계급에 따라 재질이나 의복 종류도 제한이 되었지만, 그 규정에 나와 있는 다양한 공예 기술과 재질은 당시의 생활이 얼마나 풍요로왔으며 다양한 계층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기술적으로 발전했던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통일신라시대의 복식과 장신구는 이런 기록물 외에도 황성동 석실 고분이나 용강동 석실 고분 등에서 나온 흙으로 빚은 인형(土偶)들을 통해 찾아볼 수 있습니다.
✔️ 통일신라시대 남자 복식
남성상의 토우들을 크게 분류하면 복두를 쓰고 있는 귀족, 변형의 모자 갑을 쓰고 있는 일반인, 갑옷을 입은 군인으로 나뉘어 볼 수 있습니다.
✔️ 통일신라시대 남자 관리들의 복식
깃이 둥근 단령(團領)에 머리에는 복두라는 모자를 쓴 차림이 대개 통일신라시대의 관리 복장입니다. 머리에 쓴 복두는 네 가닥의 끈이 달린 모자로, 산봉우리를 연상하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복두는 중국에서 관복과 함께 도입된 것으로, 그 시작은 중국의 북주(557년)였고, 육조 말기부터 일반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착용 방법은 네 가닥의 끈 중 두 개는 모자의 앞쪽 턱진 부분에서 묶고 두 개는 뒤쪽에서 묶어 늘어뜨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복두를 쓴 문관상에서 보면 끈 2개가 앞쪽에서 매듭지어져 있고 뒤에서 두 가닥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두는 통일신라 시대에 남성이면 누구나 착용할 수 있는 모자로, 신분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질을 아주 고급의 비단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감에 따라 834년 흥덕왕 때부터는 일반 비단이나 포로 제한하여 만들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단령은 통일신라의 관리복으로, 깃이 둥글게 만들어진 데서 연유된 이름입니다. 곧은 깃의 직령(直領)이 끈을 이용하여 가슴에서 여며 입는데 반해, 단령은 길고 둥글게 만든 옷깃으로 목을 둥글게 감싼 후 매듭단추로 오른쪽 어깨에서 여미어 입는 것입니다. 중국의 당나라에서 도입된 것이기는 하지만, 당나라 역시 실크로드의 다른 지역에서 도입하여 관복으로 착용한 것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의복이었기 때문에 남성은 물론 여성들도 입어 크게 유행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단령이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관리들의 관복으로 착용되었다. 관복은 옷단에 덧단을 댄 것이 특징이다. 그림에서 단령 아랫단 중간에 있는 가로선이 바로 덧댄 단이며, 이것은 란(欄)이라고도 하였다. 또 소매는 소매통이 비교적 넓고 풍성한 것이 특징이었다. 단령은 마치 상의와 하의로 나누어진 것 같아 보이지만, 허리에 대(帶)를 두르고 대 위로 옷을 빼내어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 상, 하로 나뉜 것은 아니다.
이 문관상은 손에 무엇을 들고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 진골과 6두품 남성들만이 관복 착용 때 손에 드는 홀(笏)이다. 홀을 들지 않은 관리들은 단순히 손을 나란히 잡고 있을 뿐이다.
발에는 신코가 뭉툭하게 살짝 들어 올려 있는 고리(高履)나 육합화(六合靴)라고 하는 장화같이 생긴 신을 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통일신라시대의 남성 토우에서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외국인을 표시했다기보다는 성인 남성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수염을 기르는 습관은 고구려에서 제작된 벽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과 관련지어 볼 때 성인들만이 부릴 수 있었던 멋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 일반 남성의 복식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둥근 깃의 단령을 입고 머리에는 복두나 변(弁)자 모양의 삼각뿔 모자를 쓰고 있다. 일반인의 경우는 복두보다는 변(弁)자 형태의 삼각뿔 모자를 많이 쓰고 있으며, 복두의 형태도 관리들의 복두와는 달리 비교적 간략한 형태를 갖고 있다.
삼각뿔 모양의 모자는 삼한시대부터 사용되어 통일신라시대에도 계속 착용된 우리 나라 고유의 모자로, 갑이라고도 불렀다. 모자는 변(弁)이라는 글자 모양과 같이 뿔 모양으로, 모자에 달린 끈으로 턱 밑에서 고정시켜 착용하였다.
단령은 관리들의 단령과 마찬가지로 둥근 깃이지만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면 옷길이가 종아리 중간 정도까지 오며, 옷단에 부착된 덧단의 표시도 없다. 또 옆선에 트임이 있는 것이 관리들이 착용하는 단령과의 차이점이다. 이 옆선이 있다는 것은 단령의 폭이 좁아도 활동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배려한 것으로, 비교적 활동성이 많은 계층에서 실용적으로 착용할 수 있는 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소매를 보면 소매통이 비교적 좁고 손목까지 오는 정도의 길이로 경우에 따라서는 소매를 걷어 착용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소매가 길어 손등을 덮는 경우도 있다.
단령 안에는 바지를 입고 있는데, 지금의 일자 바지와 비슷하며 오히려 나팔처럼 살짝 벌어지는 형태이다. 또 바짓부리는 대님이나 끈 등으로 여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군인의 복식
무릎 길이 정도의 겉옷에 바지를 입은 무인으로 신발은 신목이 긴 장화를 신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 두터운 것이 보이는데, 이는 갑옷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 왼쪽 어깨에 팔뚝이 드러나 있는 것은 무사들이 손동작을 크게 하기 위해 종종 한쪽 팔을 드러내던 습관과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또 양 옆선이 트여 활동하기 좋게 만들어졌다. 허리에는 매우 두터운 허리띠나 대(帶)를 한 것으로 보인다.
✔️ 통일신라시대 여자 복식
통일신라의 여성복은 다양한 복장 형태를 볼 수 있는데, 그 기본은 상의와 하의이며, 여기에 표라고 하는 숄(shawl)과 겉옷인 표의(表衣)를 더해 입었다.
✔️통일신라시대 표를 두른 여성
통일신라시대 여성복의 기본 형태는 단의(短衣), 표상(表裳)이라고 하는 상, 하의이며, 여기에 표를 두르거나 표의를 입었다. '표'는 지금의 숄과 같이 어깨 등에 걸쳐 입던 것이다. 표는 일반 여성들은 두를 수 없었지만, 4두품 여성까지는 사용할 수 있었다. 특히 왕비의 표는 금은사나 실크로드의 여러 지역에서 수입한 청호반새 깃털이나 공작새 깃털로 수놓아 장식할 정도로 호화로웠다.통일신라 여성들의 상의로 입던 단의는 앞길의 모양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소매의 크기나 형태로 신분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표를 두른 여인상은 옷 소매가 부리로 갈수록 넓어지고 풍성하다. 또 가슴은 네모지게 파인 형식을 하였고, 가슴에서 맨 허리띠는 길게 늘어뜨려 그 장식적인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허리띠가 겉으로 드러나면서 통일신라시대 여성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허리띠 장식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표를 걸친 여성이 표를 걸치지 않은 여성과 비교하면 그 신분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표를 걸치지 않은 여성의 경우는 상의의 소매통이 팔에 비교적 맞는 크기로 적당히 만들어 입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여성의 머리 모양
머리 모양을 보면, 위로 모아 빗어 하나로 틀어올렸는데, 이런 머리는 고계의 일종으로, 머리를 높게 올리려면 올린 머리를 고정시키는 핀 종류가 다양했을 것으로 보인다. 머리를 핀으로 고정시키고 여기에 터키석으로 꾸민 슬슬전(瑟瑟鈿) 빗을 꽂아 장식하여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자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표의를 입은 여성
표의를 입은 여인상에서 가장 겉에 입은 옷이 표의(表衣)다. 위아래가 하나로 연결된 원피스 형태로, 길이가 발등을 덮을 정도로 길고 풍성하다. 이런 겉옷은 가슴 아래에서 허리끈으로 고정시켜 입었다. 또 통일신라시대 여성들의 복식에서는 소매가 매우 길어 손을 가린 것이 많은데, 이는 당시의 여성들이 손끝을 내보이는 것을 조심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이러한 풍속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여성들이 손끝 보이는 것을 경계하여 한삼 등으로 가리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여성의 머리 모양
머리는 앞중심에서 가리마를 타고 뒤쪽으로 빗어 쪽머리같이 틀어 놀렸는데, 이는 당시에 유행한 동심계의 일종이다. 또 표의의 아랫자락으로 발끝이 살짝 보여 신코가 어느 정도 있는 신발을 신은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복식
경주 용강동과 황성동 고분의 출토 도용과 당나라 회화를 분석하여 제작한 통일신라의 여성 복식은 직물의 문양을 아름답게 표현하여 당시의 화려한 귀족 여성의 모습을 연출했다. 두께와 투명도가 다른 두 가지 실크에 문양을 날염하고 이를 겹쳐 저고리를 제작했고, 치마는 푸른색으로 염색한 얇은 실크 위에 은색으로 문양을 표현했다.
비단벌레의 날개로 장식한 옥충식치마 재현품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금록색 비단벌레는 삼국시대 의복 등을 장식했다. 토용과 마찬가지로 허리끈을 길게 늘어뜨렸다.
비단벌레는 곤충계의 보석이라고도 불리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곤충입니다. 비단벌레는 신라시대에 유행했던 공예예술 기법으로, 비단벌레의 날개를 옷이나 장신구, 마구 등에 붙여서 장식했습니다. 비단벌레는 죽은 이의 영생과 행복을 기원하는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비단벌레는 한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곤충입니다. 비단벌레는 몸길이가 25∼40㎜ 정도이고, 초록색 광택이 나는 몸에 붉은색 줄무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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